219. 부안 의상봉 / 2020.2.9. / 산타나 산행이야기
호남 300산 219차 부안 의상봉
산행하기 좋은 날씨
변산바람꽃을 못봐서 아쉽다
<의상봉>
의상봉(義湘峯)은 신라 시대 의상 대사(義湘大師)[625~702]가 이곳에 의상암(義湘庵)이라는 절을 세웠다고 하여 유래한 지명으로, 동쪽 기슭에 의상암 터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상암이 신라의 승려 의상이 살던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의상봉 이외에 기상봉(崎上峯), 마천대(摩天臺)라고도 불린다. 마천대라고 불리는 것은 조선 중기 허진동(許震童)[1525~1610]이 의상봉에 올라 지은 시에서 유래하였다.
의상봉은 부안군 하서면 백련리[북부]와 변산면 중계리[남부]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변산반도의 최고봉[508.6m]이다. 의상봉을 중심으로 북옥녀봉[354.7m], 우금산[329.0m], 상여봉[395.0m], 남옥녀봉[434.4m], 용각봉[370.0m], 세봉[433.0m], 관음봉[424.5m], 신선봉[488.2m], 갈마봉[486.4m], 망포대[494.1m], 분초대[422.0m], 낙조대[447.0m], 쌍선봉[460.7m] 등이 변산반도 국립 공원의 내변산을 이룬다.
의상봉의 동남쪽 절벽에는 진표 율사(眞表律師)가 수도하였다고 전해 오는 암자인 부사의방(不思議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사의방장(不思議方丈)은 신라 때 승려 진표가 살던 곳으로 100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으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방장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무시무시한 골짜기라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의상봉 정상에 군사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어수대가 있고, 서쪽에는 벼락 바위, 북쪽에는 새만금 간척 지구, 남서쪽에는 부안 댐이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백천(白川)을 지나[중계교] 봉래 계곡과 회양 계곡이 있으며, 백천을 따라서 지방도 제736호선이 동서로 연결된다.
[출처] 의상봉 [義湘峯]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군부대(공군)가 자리한 의상봉 정상부

의상봉 산행 개념도

청림마을에서 바라본 쇠뿔바위봉
아쉽게 변산바람꽃은 못보고 간다

곧바로 동쇠뿔바위로 치고 올라 갑니다

희미한 등로를 따라 경사진 쇠뿔바위봉을 그대로 오른다

고래등바위

동쇠뿔바위 정상(송창식 포즈 아님 / 손모양이 이상한 것은 시그널이 날아갈까봐)

MJ건설의 김사장님

한울회 원년멤버 안국장님

서쇠뿔바위
쇠뿔바위봉은 내변산 12경 중 으뜸으로 여겨진다. 국립공원 지정 이후 안전을 위해 폐쇄되었다가 2011년 23년 만에 개방되었다. 주민들에게는 귀바위봉이라 불리는 쇠뿔바위봉은 우뚝 솟은 황소의 뿔을 닮았다. 전망데크가 있는 곳이 서쇠뿔바위봉 정상이고 건너편에 동쇠뿔바위봉이 있다.
[출처]월간산

청림마을

서쇠뿔바위 수문장

방금 올랐다가 하산하여 서쇠뿔바위에 올라 바라보는 동쇠뿔바위도 이렇게 근사함

가야할 의상봉 능선

서쇠뿔바위 가는길에 수문장처럼 서있는 미어켓바위(?). 오늘도 여기를 통과하는 이들을 하나한 체크한다. 우린 무사 통과

지장봉 투구봉의 암봉들

서쇠뿔바위 전망대에서 한컷. 요즘 힘든 산행지만을 찾아 다니는 3인. 다음은 강진은 호미동산에 도전

살다가 때론 금줄을 넘어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의상봉 마천루

산죽도 봄을 기다리는 듯

의상암 자리엔 묘지가 자리하고

우물터인듯

원효굴에 도착

석간수가 흐릅니다.

원효굴 약수가 한방울씩 떨어져 만들어진 약수얼음도 보고(구전상 원효굴)
<손처사굴>
그러나 사실은 원효굴이 아니고 손처사굴(孫處士屈)이라고 하였다. 글의 내용은 2013년도 변산반도 문화자원 비화집(구전,전설)에서 채취한 내용이다.
손처사굴(孫處士屈)은 의상봉 불사의방(不思議房)에서 동북쪽 바위 벼랑 끝지점 아래에 있는 굴이다. 전설에 의하면 손씨 성(姓)을 가진 처사가 수제자를 이끌고 굴에 들어가 둔갑술이라는 술법을 터득하고자 백일 단식 기도를 위해 정진하였는데.. 백일이 지나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제자들은 손처사(孫處士)를 보니 피골이 상접하여 생명유지가 어려울것 같아서 거짓말을 하였다. "처사님이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정진하던 처사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있는데도 보지 못하니 자기 기도가 이루어진 걸로 오판하고 옷을 벗은채 속새로 내려갔다가 맞아 죽었다는 애달픈 전설과..
<또 다른전설>
또 다른 전설로는 손처사(孫處士)라는 사람이 하인을 데리고 이 굴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데 굴천장에서 맑은 물이 나오고 그 옆에서는 하얀 쌀이 매일 한 홉씩 솟아 나오는데 하인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겨 구멍을 더 뚫으면 더 많은 쌀이 쏟아져 나올거라는 생각으로 그만 부지깽이로 구멍을 쑤시자 쌀은 커녕 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참선하던 손처사(孫處士)는 어리석은 하인의 행동을 보고 "나의 정성이 부족하여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고 구름속에 묻힌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꼼짝 못하고 죽었다 하여 낭떠러지의 골짜기를 '달상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출처] 변산국립공원 블로그에서 발췌

드디어 고대하던 부사의방을 보다 진표율사가 수도했다는 한평남짓한 절벽중간의 공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불사의 방장(不思議方丈)은 신라 때 승려 진표가 살던 곳으로 100척 높이의 나무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면 곧 방장에 이를 수 있고, 그 아래는 모두 무시무시한 골짜기이며, 쇠줄로 그 집을 잡아당겨서 바위에 못질하였다.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만든 것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표율사>
진표율사(眞表律師)는 전주 벽골군(碧骨郡) 도나산촌(都那山村) 대정리(大井里)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출가할 뜻을 품으니 아버지가 허락하였다. 금산수(金山藪)의 순제법사(順濟法師)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순제법사가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주고 『전교공양차제비법(傳敎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戒法)을 지니고 미륵(彌勒)ㆍ지장(地藏) 두 보살 앞으로 가서 간절히 참회하여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율사는 가르침을 받들어 하직하고 물러나와 두루 명산을 유람하였다.
나이 이미 27세인 상원(上元) 원년 경자년(760, 통일신라 경덕왕 19)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을 만든 뒤 보안현(保安縣)으로 가서 변산(邊山)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5홉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홉을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彌勒像)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戒法)을 구했으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發憤)하여 바위 아래에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志願)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여 바위를 두드리며 참회하니, 3일 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 7일이 되던 날 밤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손에 금장(金杖)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주니 손과 팔뚝이 예전처럼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靈應)에 감동하여 더욱더 정진하였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중(兜率天衆)이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계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참회하는구나.” 지장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彌勒)이 또 목간자(木簡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 간자라고 씌어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하였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니, 이것은 곧 시 (始)와 본(本)의 두 각(覺)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法)이며, 여덟 번째 간자는 새로 만들어질 종자(種子)이니, 이것으로써 과보(果報)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 (兜率天)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사라졌는데, 이때가 임인년(762) 4월 27일이었다.
[출처] 관동풍악발연수석기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저 소나무가 불사의방 내려가는 입구입니다.
산꾼들의 로망 불사의방에 가려고 합니다.

건너편에서 동료들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진은 어디 간거야)

셀카로 한장
진표율사는 여기 3평 남짓한 곳에서서 무슨생각들을 했을까요

암자를 잡아맸다는 쇠말뚝 자국과 다람쥐 밥를 줬다는 사각 먹이 구멍도 있다

바라다 본 쇠뿔바위봉

우리의 호프 김사장님

이제 떠나야할 시간입니다. 아쉬운 이별을 하고

군부대가 있는 의상봉. 통제구역이다.
<의상봉(義湘峯)> 높이 495.7m. 변산(邊山)은 예로부터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이라 불렸고,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혀왔다. 의상이라는 명칭은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가 이곳에 의상사라는 절을 세웠다 하여 유래한 지명이라고 전해지는데 산 동쪽 기슭에 의상암 터가 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안에 “의상암(義湘庵)은 신라의 승려 의상이 살던 곳이다." 김극기(金克己, 1150~1204)의 시에 ‘기묘한 일만 겹 바위 높은 하늘에 비껴 있어 위로 구름 끝까지 올라가니 길이 비로소 끊어졌다. 홀연히 의상대사의 여운 있음이 기쁘고, 하늘에 닿은 옛 잣나무 어둠 속 바람에 읊조린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 허진동(許震童, 1525~1610)이 의상봉에 올라 지은 시에는 마천대(摩天臺)라는 다른 지명도 등장한다. 지형도에 기상봉으로 표기된 것은 조선지형도 부안에 기재된 의상봉(倚上峯)에서 ‘의지할 의(倚)’ 자를 ‘험악할 기(崎)’ 자로 잘못 옮긴 것으로 보인다.

부안호의 모습이 보입니다.

포갠바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인위적인 시설물이 아닌 자연상태의 모습이라면 대단히 희귀한 모습. 포갠바위 위에 올라 인증하는 분의 사진도 본적이 있다.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바라며 통과한다

삼각봉(투구봉, 깃대봉)의 모습이다. 어쩌자고 이런 봉우리가 생긴 것일까요? 투구봉으로 올라 좌측으로 내려가려했으나 길을 못찾고(이전 답사기에서 길이 있다길래...) 회귀하여 투구봉 입구 고개부에서 길을 찾아 우측으로 하산한다

우리나라 산야의 모습이 아닌거 같다(일부 블로그에선 저길로 내려갔다고 나오는데)

병풍바위를 한번 더보고

우린 깃대봉에서 길을 잃었어요
돌을 굴렸는데 한참 내려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의 길이 아닌듯 합니다

입구 우측에서 길을 찾아 내려왔습니다

너무나도 맑은 계곡뮬. 부안호가 만들어 지면서 이주한 뱀사골 구간이다
그저 반가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