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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300산 192차 광주 백우산(판사등산)

철학자의 숨결이 느껴지는 산행
오늘의 야생화 자주괴불주머니 애기나리

<백우산(판사등산)>

고려 때에는 백우산(白牛山)이 청량산(淸凉山)이라 불렸는데, 문수보살이 청량산에 상주하였다고 한다. 백우산은 고지도 등 옛 문헌에 주로 양림산(養林山)으로 나온다.

『광주읍지』[1895]에 “양림산은 불대산의 남쪽 줄기이다.”라고 하였으며, 『광주지』[1964]에 “양림산은 광주 서북쪽 40리[16㎞]에 있는데 일명 백우산(白牛山)이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흰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의 산이 서쪽에 있는데, 오행론에서 서쪽은 흰색을 상징하므로 '백우'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판사등산이라고도 한다.

 

백우산은 어등산, 용진산, 복룡산, 석문산과 함께 황룡강을 중심으로 한 광산 지역 구한말 의병 활동무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지』[1964]에는 백우산에 고봉 기대승의 낙암정(樂庵亭)이 있다고 하였다.

백우산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광곡마을에는 기대승을 배향한 월봉서원이 있다. 월봉서원은 앞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뒤로는 백우산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월봉서원에는 고봉이 공부하던 암자인 귀전암 터를 비롯하여 기대승의 아들이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칠송정, 재실 겸 서당인 귀후재, 광주광역시 지방기념물 빙월당이 있으며, 월봉서원 옆에 백우정이라는 정자도 있다.

월봉서원 왼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기대승 묘소가 나온다. 월봉서원에서 시작된 백우산 등산로는 ‘철학자의 길’이라고 불린다.
백우산 남서쪽 두정동에는 백룡사가 있는데 옛 양림사 터로 부도 2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현 두정마을에는 향적사가 있다.

[출처] 백우산 [白牛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정상표지석 

 

기대승선생을 모신 월봉서원(빙월당)입니다.

<월봉서원>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조선전기 기대승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578년(선조 11)에 김계휘()를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46년(인조 2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654년(효종 5)에 ‘월봉()’이라고 사액되었다.

1671년에 송시열() 등의 건의로 인근의 덕산사()에 모셔져 있던 박상()과 박순()을 이향()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김장생(), 1769년(영조 45)에 김집()을 추가배향하였다. 당시의 경내건물로는 사우()를 비롯하여 충신당()·존성재()·명성재()·유영루()·내삼문() 등이 있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그 뒤 전라남도유림에 의하여 1941년 5칸의 빙월당()이 건립되었으며, 1972년에 4칸의 고직사(), 1978년에 외삼문()과 3칸의 장판각(), 1980년에 사우(), 1981년에 내삼문이 건립되었다.

빙월당은 1979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장판각에는『고봉집()』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3만6000평과 임야 87정보 등이 있다.

[출처] 월봉서원 [月峯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판사등산(백우산) 탐방로

 

철학자의 산책길입니다

 

퇴계선생과 사단칠정의 논쟁을 벌였던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묘소입니다

<고봉 기대승>

본관 행주().  명언().  고봉() ·존재(). 시호 문헌(). 전남 나주() 출생. 1549년(명종 4) 사마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이 되었다. 1563년 사가독서()하고, 주서()를 거쳐 사정()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1567년(명종 22)에 복직되어 원접사(使)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 선조가 즉위하자 집의()가 되고, 이어 전한()이 되어 조광조() ·이언적()에 대한 추증()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우부승지로서 시독관()을 겸직하다가, 1570년(선조 3) 대사성() 때 영의정 이준경()과의 불화로 해직당했다. 후에 대사성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부제학이 되어 사퇴하고, 1572년 다시 대사간을 지내다가 병으로 그만두고 귀향하는 도중 고부()에서 객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독학으로 고금에 통달하여 31세 때 《주자대전()》을 발췌하여 《주자문록()》(3권)을 편찬할 만큼 주자학에 정진하였다. 32세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 ·김인후() 등 호남의 석유()들을 찾아가 토론하는 동안 선학()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다. 특히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황과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사칠이기론()의 변론 후 이황은 그의 학식을 존중하여 대등한 입장에서 대하였는데,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 선생 사칠이기왕복설()》 2권에 남아 있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사후 1590년(선조 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의 주문()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에 추록()되었고 덕원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주요저서에는 《고봉집()》 《주자문록()》 《논사록()》 등이 있다.

[출처] 기대승 [奇大升]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솜방망이도 화사하게

 

자주괴불주머니가 이 산의 주인입니다.

<자주괴불주머니>

자주괴불주머니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주로 자라는 2년생 초본이다. 생육환경은 습기가 많은 양지나 반그늘에서 자란다. 키는 20~50㎝이고, 잎은 길이 3~8㎝로 삼각상 원형이고 3개씩 2회 갈라지며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고 어긋난다. 꽃은 홍자색으로 길이는 4~12㎝고 원줄기 끝에 부채 모양으로 뭉쳐서 달린다. 열매는 6~7월경에 길이 1.5㎝, 폭 0.3~0.5㎝가 긴 타원형 모양으로 달리고, 종자는 검고 광택이 난다. 관상용으로 쓰이며, 뿌리를 포함한 전초는 약용으로 쓰인다.

[출처] 자주괴불주머니 (야생화도감(봄), 2010. 4. 10.)

 

미나리냉이

 

고봉선생이 학문을 하시던 귀전암터

 

보춘화도 봄을 맞고 있어요

 

애기나리가 절정입니다

<애기나리>

산지의 숲 속에서 자란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퍼지고, 줄기는 곧게 서며 가지가 없거나 1∼2개 갈라지고 높이가 15∼40cm이며 밑 부분이 3∼4개의 잎집 모양 잎에 둘러싸인다. 잎은 어긋나고 길이 4∼7cm의 달걀 모양 또는 긴 타원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고 밑 부분이 둥글며, 잎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미세한 돌기가 있으며, 양면에 털이 없고, 잎자루가 없다.

꽃은 4∼5월에 흰색으로 피고 줄기 끝에 1∼2개가 밑을 향해 달린다. 작은꽃자루는 길이가 1∼2cm이고, 꽃잎은 6개이며 비스듬히 퍼지고 길이 12∼16mm의 바소꼴이며 끝이 뾰족하다. 수술은 6개이고, 수술대는 꽃밥 길이의 2배이며, 꽃밥은 긴 타원 모양이다. 암술대는 끝이 3개로 갈라지고, 씨방은 달걀 모양이며 3실이고 암술대보다 길다.
열매는 장과이고 둥글며 검은 색으로 익는다. 어린순은 나물로 먹는다. 한방에서는 뿌리줄기를 보주초()라는 약재로 쓰는데, 몸이 허약해서 일어나는 해수·천식에 효과가 있고, 건위·소화 작용을 한다. 한국(경기·강원 이남)·일본·중국에 분포한다.

[출처] 애기나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고봉선생의 기운이 전해져서 인지 예덕나무도 이렇게 봄을 맞이 합니다

 

봄날의 산길이 점점 여름날의 산행길을 흉내내고 있습니다

 

광주 판사등산 조기산행을...

 

제비꽃도 화사하게

 

병꽃나무도 꽃을피우고

 

붉은 병꽃나무에도 개미 등 벌레들이 바삐 움직리고 있네요

 

키작은 꽃 금창초도 어렵게 찾았습니다

 

애기똥풀도 피고

 

키작은 나비들이 날아다이는듯 합니다(콩제비꽃)

 

고사리를 끊기 시작하면 한주먹 이상은 끊어야 합니다. 안그러면 집사람한테 야단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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